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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3글월의 지도 계시록 
오야사마=영원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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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ssion9
     天理敎의 경전에서 본 공동체구상과 종교통일


      西山 輝夫 (日本, 團際大學 客員敎授)


천리교의 創敎는 1838년이고 정식으로 교회라는 조직이 생긴 것은 1888년의 일이다.
바로 말하면 천리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태어난지 약 150년의 역사와 경험이 있고, 그후 교단이라는 단체에 상당하는 조직이 활동을 개시하고부터는 약 100년이라는 세월이 경과하고 있다. 이것을 세계의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비교하면 10분의 1 이하의 경험과 실적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단계에 있다.

단순히 시간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공간적으로도 이것은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천리교는 현재 '점과 선의 종교'로서 '面의 종교'라는 영역에는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 공동체라는 것은 "면의 종교"가 긴 시간을 들여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본다면 천리교는 공동체와 관련하는 사항에 대하여 구체적인 제언을 하기에는 경험이 현저하게 부족하다.

그러나 창교 당초부터 부과된 사명에서 본다면, 설령 현상이야 어떠하든 공동체의 이념과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리교 창교의 취지를 돌이켜보고 이어서 교리의 근본과 접하고 거기서 미래에 대한 기본 자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천리교의 교조는 나까야마미끼라고 하는데 후의 天韓書에 따르면 "하찮은 농가의 한 여자"라고 일컫고 있듯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농가의 주부였다. 시대는 에도시대(工戶時代)의 말기로 봉건적인 색채가 농후한 시대였다. 장소는 당시의 大和國(나라현에 소재) 북부의 작은 농촌으로 정치·경제의 중심에서 벗어난, 소위 잠들어 있는 지대였다. 또한 농부라고 하면 국민의 8할이 그들이고, 일을 하여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의무만이 강제되었던 계층으로 세상이나 사람을 지도한다거나 교육할 입장에는 놓여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면 나까야마미끼라는 중년의 주부가 천리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조건은 거의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본 이야기로서 創造神의 활동세계는 그것과는 다른 모양이다.

그리고 사실 천리교는 후에 교조가 된 나까야마미끼라는 여성이 종교적인 수행을 쌓거나 많은 공부를 하여 창설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눈으로 보면 실로 갑작스럽고 불가해
한 天啓 현상에 의해 시작된 종교이다.
 
자세한 사정은 생략키로 하고, 1838년 가을 신의 계시에 의해 나까야마미끼는 '창조주의 야시로(居所:사당:집:現身)'로 정해졌다. '神의 야시로'라는 것은 오후데사키라는 계시록에 따르면 "口人間心月 日也 입은 인간 마음은 월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듯이 신체는 통상의 인간과 다른 면은 하나도 없으나 마음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神 즉 창조주의 마음과 동일하다는 입장의 사람을 지칭한다.

그리고 神의 마음이란 자녀들인 전 세계의 인간을 돕고 싶다는 한줄기의 마음이라고 시사된다. 이 '창조神의 야시로(집:現身)'로 정해진 나까야마미끼를 敎祖라고 부르고 천리교 신자는 '오야사마 Oyasama'라고 부르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최초의 계시는 "나는 으뜸인 神, 진실의 神이다. 이 집터에 인연이 있어 이번에 世界一列을 구제하기 위해 하늘에서 하강했다"는 것이다. '세계일렬'이라는 것은 전 세계의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천리교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종교이지만 이 계시에 따르면 원래의 발단에서 전 인류의 구제를 목적으로 시작된 종교이며 좁은 일본인만의 종교로 끝난다면 그 목적에 반하게 된다.

'일렬(一列)'이라는 것은 흥미 깊은 표현이다. 인간은 上下로 일렬이 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한 사람이 타고 그 위에 또 탄다는 것은 서커스의 명인이라도 고작해야 셋이나 넷이 한도이고 원래가 안정을 결여하고 있다. 같은 평면에 질서 있게 늘어서야 비로소 안정된 일렬의 모습이 성립되는 것이다.

평면에 있어서의 일렬이라도 세로의 일렬과 가로의 일렬이 있다. 세로의 일렬은 우선 순위라든가 능력에 의해 성립되는 순위로 택시를 기다리는 행렬이나 학교 성적의 랭킹 등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빠른자가 이기고 강한 자가 이겨 자유의 원리가 여기서 작용하고 있다. 그에 반하여 가로 일렬이라는 것은 순서에 관계가 없고 평등의 원리를 나타내고있는 것 같다.

天理敎의 일렬이라는 것은 어느 쪽이냐 하면 가로 일렬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바로 말하면 기본적 인권의 존중과 확립이 구제 실현의 불가결한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구제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다른 말로는 창조목적인 '陽氣있는 생활, 즐거운 삶'의 세계에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양기 있는 생활'이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행복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양기 있는 생활' 이 곧 행복이라는 뜻은 아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세속적, 물질적 자기 중심적인 냄새가 뒤따르지만 "양기 있는 생활"이라는 것은 정신의 정화,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조건에 부응하여 나타나는 바람직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은, 말하자면 善과 행복의 일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자가 목표 삼는 것은 우선 선(善)이라는 말이 된다.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이라 하더라도 座禪을 한다거나 조용한 환경에서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고 또는 엄격한 수행을 한다거나 계율을 지키는 절차는 중시하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활동이 중요하고 그것은 "남을 도우고 구제해야 내가 도움받고 구제받는다"는 가르침에도 잘 나타나 있다. 창조神의 마음이 자녀들인 인간을 구제하고 싶다는데 있는 것이라면 자기가 구제받고자 원하거든 타인을 구제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므로 그 理가 돌아오는 일을 신조로 삼고 살아나가는 것을 바란다. 그러니까 남을 도우므로써 비로소 도와지며 구제하므로써 구제받게 되는 理를 깨우쳐 모두가 서로도우고 구제하여 양기로운 삶의 목적세계에 함께 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자연히 자기 몸의 행복도 부여받게 된다. 사람을 돕는다는 善의 기초 위에 수립된 행복이 '양기 있는 생활'이라는 것에 적합한 내용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天理敎가 특히 윤리적 종교라는 말은 아니다. 모랄(Moral)보다는 오히려 모라르 (Morale)를 중시하는 듯하다. 올바르게 간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으로 들어가면 자기 한사람을 자랑하거나 반대로 사람을 마음속으로 책망하는 차가움이 자칫하면 나타날 수도 있다. 위선자도 나올 것이다. 천리교에서는 그보다는 창조하여 살려주신 神恩을 감사하게 받아 즐기며 용기 있게 사는 것을 좋게 여긴다.

이 용기 있는 상태는 창조神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일에 최고의 의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당연히 옳은 것과 결부되어 있다.

'양기 있는 생활'은 인간으로서 이 세계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는 기쁨을 충분히 맛보는 것이기도 하다. 모처럼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조금도 좋지 않았다는 실망, 비관, 절망과는 다른 것이다. 더구나 이 기쁨은 사후의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고 영혼 불멸이라는 전제에 있어서 이 지구라는 무대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든 맛볼 수 있는 경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창조神의 인간 창조의 목적은 이 지구라는 공간에 진화가 완숙되게 수호를 베풀어 건설되는 '즐거움이 가득한 놀이를 즐기는 세계'이고 이러한 선천적 약속 위에 성립되어 있는 인간세계라고 본다면 '양기 있는 생활, 즐거운 삶'의 경지의 세계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고, "이것은 어떠한 인위적인 힘을 가지고서는 방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창조섭리에 의한 지상천국의 미래 정신이 천리교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기독교가 주장하는 원죄의 사상은, 이런 상태로는 양기 있는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인류 공통의 선천적 惡因緣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 반하여 천리교에서 말하는 창조神은 양기 있는 생활을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상은 그 소질을 순조롭게 키워 나간다면 양기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인류 공통의 선천적 善圍緣이란 것을 인간은 본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을 천리교에서는 '으뜸인 인연'이라 말하고, 이것을 자각하는 데서 기쁨이 생긴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낙관적이고 심각한 인간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변명을 허락한다면, 이와 같이 천리교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창조주의 인간 창조 목적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神을 철저하게 믿었을 때, 창조목적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나오고 행동력도 나온다.

그러나 神을 놓치면 양기 있는 생활에 대한 희망도 희박해져 간다는 구조라고 생각한다. 神이 없는 사회주의자가 신봉하고 있는 것이 유물사관이라고 한다면 천리교는 陽氣生活 지상천국완성의 신봉자이다. 즉, 인류는 창조이래 오로지 양기생활실현 즉 즐거운 삶의 세계건설을 향해 걷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 실현을 완성시키기 위해 창조주의 야시로(사당: 現身)인 오야사마를 통해 태초의 설정된 바를 일러 인간들과 함께 건설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고 있다.

설령 현실세계에 굶주림과 빈곤이 있고 핵무기의 공포와 전쟁의 비참이 있으며 암 극복의 길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양기 있는 생활을 향한 보조는 좌절하는 일이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양기 있는 생활의 실현 즉 인간창조목적에 방해가 되는 면이 강한 것을 일괄하여 창조주의 뜻에 어긋난 마음에 의해 몸이나 운명에 나타내 보여주시는 身上·事情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상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신체를 지칭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신체에 나타나는 질병을 가리킨다. 사정도 이와 마찬가지로 넓게는 생활 환경상에 나타나는 모든 사항을 가리킨다. 즉 탄생도 결혼도 취직도 모두 사정이다.

좁게는 생활 환경상에 나타나는 고뇌를 말한다. 곤란, 부자유라고 해도 좋다. 사정의 고뇌에는 넓은 폭이 있는데 가정불화, 일가의 빈곤, 어린이의 비행화 등의 레벨에서 전쟁, 세계 불황, 기후불순을 비롯하여 공해에 의한 환경오염, 교통사고의 심각화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사회인의 통상의식에서 보면 이러한 신상, 사정이 없는 세계가 '최선'이다. 즉, 질병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이 가정이 평안하고 생활이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국가도 사회도 평화로우면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뿐이라면 이웃의 불행에 고통을 느낀다는 인간애는 희박해지기 쉽고 눈에 보이지 않는 타국의 굶주림이나 비참에 대한 동정심도 사라지게 된다.

일본인이 걸핏하면 세계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이러한 자기중심적 행복감이 문제로 제기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하여 천리교에서는 "신상·사정은 이치의 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질병과 빈곤은 괴로운 것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창조神의 존재를 믿게 된 원인이 곧 身上·事情이었으므로 이를 계기로 神의 마음으로 사는 길을 선택해 나가면 이윽고 거기서 행복이라는 꽃이 피고 결실이 맺어짐을 확신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 때의 기쁨의 질의 깊이는 불행을 체험하지 않고 얻어진 행복보다 훨씬 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질병과 빈곤은 곧 불행이라는 사상에 대하여 천리교에서는 그것들은 현재에 있어서 불행을 초래하는 사항이지만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플러스로 변화시킬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질병과 빈곤이라 하더라도 신앙에 의해 창조신의 뜻에 따르게되면 양기 있는 생활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인생 도상에서 발생하는 각종 고통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까? 이것은 어느 종교에 있어서나 중요한 과제이지만, 그 대처 방식에는 각기 특징이 엿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불교에서는 집착을 멀리한다거나 세계는 불변의 실체가 없다고 본다거나, 말하자면 주관적 방법이 공통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는 고난을 참아내고 기도한다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어쨌든 절차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천리교의 牙笭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해보기로 하겠다. 대개의 종교에는 신자가 지켜야 할 계율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특히 엄격한 모양이다. 인간의 마음은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악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인데 그것에 대하여 神 또는 붓다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테두리를 정하고 구제를 받기에 적합한 인간 측의 조건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계율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이해되지만, 천리교에서는 그러한 구제의 조건으로서의 계율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 신자도 교회장 등의 전문직에도 공통되어 있다. 원전을 通觀하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표현보다‥‥‥하라"는 표현 쪽이 많다. 이것은 모랄보다 모라르를 중요시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어쩌면 선악은 이미 2천년 이상이나 계율로 가르쳐 왔으므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높은 의미의 충실한 기쁨을 만들어 내는데 힘을 쏟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상도 있는 듯이 생각된다. 명상은 마음을 정화하고 지혜를 얻는데는 좋은 방법이지만 천리교에서는 귀찮게 재촉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생각하라'고 하는 말은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 경우의 생각이라는 것은 창조神의 마음을 깊이 탐구하고 망설이거나 의심하는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몸과 마음을 다해 神의 마음에 의지하는 삶의 방식을 확립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천리교에서는 神의 말에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의 가르침과도 비교하여 깊이 고찰하고 납득한 다음에 믿음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므로 근대 정신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즉 천리교는 유아독존이 되는 일을 피하고 타종교에 비하여 너그럽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공동체구상에 필요한 태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리의 본 줄거리에서 보면 천리교 구제의 근본은 '쓰또메(창조의 理를 재현하는 근행)'라고 일컫는 독특한 祭儀에 있다. 地歌(근행의 노래 神樂歌)와 鳴物(반주악기)에 맞춰서 정해진 몇 사람이 춤을 바치는 양식으로 통상 한 달에 한번 근행한다. 이것을 月次祭라고 한다. 천리교교회본부에는 인간을 창조한 장소의 증거로 감로대라는 것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에워싸고 태초의 창조를 재현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쓰또메(근행)'의 地歌를 '미까구라우따(神樂歌)'라고 한다. 제1절부터 제 5절까지 있고 제 5절은 쥬니꾸다리(12장)라 하여 친숙한 숫자 세기 노래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 1절은 가톨릭의 기도문에 상당하는 것으로 "아시끼오 하로오데 다스케 다마에 텐리오노미코도 : 악한 것을 제거하고 도와주소서 天理王命이시여"이라고 21번 되풀이하여 왼다. '악한 것'이란 질병이나 빈곤 등 외부로 나타난 악한 사항이 아니라 그런 악한 사항에 편성될 수밖에 없는 마음 내부의 악한 마음씨를 가리킨다.

천리교에서 신봉하는 神을 어버이신님(親神)이라 부르고 祈念할 때는 텐리오노미코도(天理王命)라는 神名을 외운다. 이슬람교가 알라신을 외우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해도 괜찮다. 이제부터는 神이라는 말이 아니라 어버이神이라는 호칭을 쓰기로 하겠다. 親神이란 인간을 창조하여 키워주신 처음 시작의 어버이를 神이라는 의미로 두렵고 존엄스러운 신이 아니라 인류 탄생이래 그 생사의 모든 것을 통하여 자녀들인 인간을 수호하고 창조목적을 위한 양기 있는 삶의 세계로 인도해주시는 어버이와도 같은 神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어버이라는 神 밑에서 세계 一列의 인간은 귀여운 어린아이이고 서로는 형제라고 여긴다. 즉 기독교도 불교도 무신론자도 어버이神의 관념 아래서는 모두 형제로서 타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親神은 인간을 돕고 인간끼리는 형제애를 통해 서로 돕는다. 이것이 양기 있는 삶이 가득한 세계로 향하는 줄거리가 된다.  

'쓰또메(근행)'가 세계 일렬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향하는 만가지구제의 근원되는 祭儀라고 한다면, 사즈께(수훈기도)'는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어버이神의 인간을 돕고자하는 마음을 이어주고 병이 낫기를 기도하는 행위를 도와줌으로써 어버이神의 존재와 그 絶大한 작용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수단이다.

그것을 '불가사의한 도움'이라고 하는데 '사즈께'는 이 '불가사의한 도움'이 오야사마라는 창조주의 현신되시는 분께만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오야사마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기를 제시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천리교의 신자들은 이 '사즈께'를 통해 인간을 창조한 절대한 神임을 체험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의약으로 치유될 수 없는 신상 사정자들이 오야사마의 가르침을 듣고 '사즈께'를 통해 확신을 갖게되면서 마음을 바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등종교는 영혼의 구제를 주로 하는 것이고 천리교는 질병 치유를 돕는 것이므로 저급하다는 비판을 자주 듣는다.
여기에는 타당한 점도 타당하지 못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한번이나 두 번 기적적으로 도와졌더라도 어떤 병에 걸려 반드시 죽는다. 또한 질병에의 도움은 자기가 직면하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을 최상의 이익으로 여기는 근시안적 에고이스트를 만들어내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천리교는 질병의 완치를 기원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질병이라는 실존적 한계 정황을 하나의 계기로 어버이神의 존재를 증거하므로써 금후에는 어버이神의 마음을 따라 산다는 타입의 인간으로 갱생시키는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천리교의 입신자는 질병이나 사정의 고뇌 때문이라는 사람이 태반이고 이들은 "내 몸을 도움받고 싶다"는 마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런 현세 이익 신앙이라 하더라도 신앙의 과정에서 창조이념에 따라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의 인간으로 점차 변신해 나가고, 또한 그 과정에서 병이 회복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버이인 神은 전지 전능하다고 능히 일컫는다- 거기서 나오는 소박한 생각은 만일 창조神이 전지전능하다면 질병 정도야 도울만한 힘이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전지 전능하지만 질병을 고칠 수 없다고 한다면 능력이 부족한 듯이 여기게 된다.

천리교 포교사는 의사도 약제사도 아니다. 그러한 국가 공인의 자격을 갖지 않은 자가 왜 질병을 고치는 분야에 감히 뛰어들겠는가? 그 근거는 "借物·貸物의 이치"라고 일컫는 교리에 의지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육체는 빌린 것, 마음 하나가 나의 것.
단 하나의 마음에서 어떠한 이치도 나날이 나타나온다.
어떠한 이치도 받아들이는 중에 자유자재라는 이치를 분별한다."고 지도말씀이라는 원전에 나와있다.

身體는 어버이이신 창조神으로부터 빌려받은 貸物이고 어버이神으로부터의 借物이지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 증거로 자기 의지에  반하여 언젠가는 빌려쓰고 있는 차물을 돌려준다. 이것이 죽음이다. 그러나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라는 것은 영원하다. 마음 그대로 기록해 둔 상자가 곧 영혼이며 마음 그대로 그려놓은 모습이 곧 육체이며 마음 그대로 나타나는 모습이 곧 운명이다. 마음이라는 자유용에 의해 영혼도 육체도 운명도 전부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천리교의 인간관이다. 마음은 자기의 소유물이라 생각하고 신체는 상식이나 편견, 욕망에 사로잡혀 그 빛을 잃고 있다. 이것이 전도된 인간관이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미망과 집착의 세계이다.

마음의 본질은 자유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神을 따르는 자유도 반항하는 자유도 허용되어 있다. 신앙이라 하더라도 자유의지에 기초한 것으로 습관이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천리라는 태초에 설정된 이법에 따르게 되면 더욱 진화성인되든가 퇴화되어 우마의 길을 향하든가 그 모두의 자유도 허용되어 있다. 각자의 마음나름에 따라 행복도 그 반대되는 것도 선택되는 자유가 허락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마음의 배려 방식에 따라서 "어떤 이치"도 나온다고 여긴다. 즉, 성공도 실패도 건강도 질병도 생각해 보면 자기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기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자신에게 돌아온다.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것은 제 1의 적으로는 자기 책임으로써 세상이 나쁘다느니 하고 책임을 다른 것에 전가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마음의 본질은 자유라 하더라도 환경의 제약이 있으므로 지금으로서는 자유자재가 아니다. 자유자재라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뜻대로 되어가는 경지로 그것이 양기 있는 생활이 실현되는 이상세계로써 이 땅 이 지구에 건설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어버이인 神은 창조목적세계를 신과 자녀들이 함께 건설하도록 설정했으며 그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이 세상에 출현했다고 한다.

신체조차도 빌린 것이라면 금전이나 물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들은 "하늘의 주심"이라고 가르친다. 요약하면 금전이나 물질은 우선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나아가 그것들을 사용하여 양기 있는 생활을 하도록 한다는, 위로부터 어버이神이 부여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창조 설정한 원리에 따라 가르쳐 준 것이라 여긴다. 말이나 지혜 그리고 학문과학도 금전이나 물질도 가르쳐 주시고 있게해 주심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사용법의 기본은 금전이나 물질을 자기 혼자의 욕망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기뻐하도록 사용해 나가는 것은 덕으로 쌓여짐을 가르치며, 그것이 살아있는 사용법이고 양기 있는 생활의 길은 거기서 열린다고 본다. 가톨릭은 금전, 물질에 대하여 "소유는 사적으로, 사용은 공공으로"라고 하는데 그것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천리교 교리 중 공동체 구상에 효과적일 수 있는 분야에 대하여 언급했다. 다시 이것을 요약하면, 양기있는 생활이란 단순히 천리교 신앙의 신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망이라고 생각한다. 천리교는 그것을 보다 명확하게 표명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양기있는 생활의 내용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고 실현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는 있지만 목표에 관해서는 일치하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또 하나 지주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세계 일렬은 형제라고 하는 사상이 있다. 천리교의 경우 이것은 어버이신의 인간 창조라는 관념이 근저가 되고 있으나 가령 믿는 神은 다르다 하더라도 일렬 형제의 이념은 보편성이 있는 것으로 믿는다.

천리교가 갖는 관용성은 금후에도 유지될 것이고 이것은 여러 종교의 융화에 기여할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한 천리교의 인간관, 물질관은 가혹한 경제전쟁의 사막에 자비로운 비를 가져오고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될 것이다. 서로 돕는다는 자세도 분명 공동체의 정신에 합치한 것이다.  

그 위에 덧붙여야 할 것으로 천리교의 평등사상이 있다. 천리교의 중요한 사회 개념으로 '높은 산'과 '계곡 밑'이 있는데 이것을 단서로 평등사상의 대략을 기술해 보겠다.

'높은 산'이라는 것은 권력, 분, 지력, 체력 등 생존경쟁상 유리한 것을 가지고 있는 계층을 말하며 이것은 지배층과 겹친다. '계곡 밑'은 그것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약자, 빈곤자, 피지배계층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역사는 "높은 산이 계곡 밑을 뜻대로 하는"일이 당연시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神의 유감'으로 원전에서는 분명하게 부정되고 있다. "높은 산에 자라는 나무도 계곡 밑에 자라는 나무도 동일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어버이인 창조神의 세계의 진실로서, 인간이 이것을 어기는 것은 악이라고 여긴다.

즉, 후천적 권리의 상이에 따라 선천적인 인간으로서의 가치의 평등성을 무시한다면 양기 있는 삶의 세계건설에 맞는 사회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회적 불평등을 일거에 변혁하는 수단으로 혁명이 있다. 사회주의 혁명은 "계곡 밑이 높은 산을 뜻대로 하는"일을 목표하는 것인데, 원전에는 그러한 과격한 수단을 통하여 형식적 평등을 실현하려고 하는 시도는 반드시 좋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의 표현에 따르면, 인격의 평등화에 노력하는 것이 첫번째이고 마땅히 형식의 평등화가 차츰 실현되어나가는 것이 순서라고 하는 온건한 노선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온건노선의 내용은 무엇인가? 원전에 따르면 어버이인 神은 우선 '계곡 밑'에서 장래 어버이이신 창조神의 손발이 되어 세계를 돕는데 몸을 바칠 인재를 발견하고 끌어 모아 사용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을 '用木' 혹은 '用材'라고 부른다. 양기 있는 생활의 세계 실현을 위한 보조를 건축공사에 비유하여, 그 용재가 되어 골조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用木'은 국적에 관계가 없다 '용목'은 '높은 산'인 권력자의 의지보다 親神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어버이神의 자녀가 '일렬 형제'이고 인간은 평등하며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즐거운 삶의 세계로 향하는 길임을 알게 되면 그 방향을 향하여 살기를 목표하는 자이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으로는 이렇다 할 영향은 없지만 그러한 인간이 수백만, 수천만이 되면 '높은 산'도 그것을 무시하고 행동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신앙을 달리하고 있더라도, 어버이神의 관념이 없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양기 있는 생활을 위해 힘쓰는 인간은 모두 '용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리핀을 보고, 또는 최근의 한국 인심의 동향을 보고 나는 그 징후를 읽을 수 있다. 아시아는 옛날의 식민지시대의 아시아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공동체 구상에 관한 천리교의 자세, 준비 또는 가능성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천리교는 현재로서는 '점과 선'의 종교이다. 바로 말하면 포교가 가장 중요한과제로 의식되고 있는 단계로써 공동체 구상에 대하여 말할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특히 아시아 지역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우선시키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을 전제로 삼아 약간의 전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일본은 별도로 하고, 현 상황으로 천리교의 포교선이 신장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는 한국, 중화민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타일랜드, 인도네시아, 인도, 네팔 등이다. 이중 한국에는 표면적으로 30만의 신자가 있고 약 3백의 교회 가 있으나 전체 적으로 보면 소수파이고 큰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위의 여러 국가에서 부딪치는 문제 중 하나는 천리교는 결국 일본의 종교가 아닌가 하는 의심과 경계심이 밑바닥의 흐름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처럼 반일 감정이 강한 나라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와 그 이데올로기로서의 일본국가 神道에 대한 반발이 강하고 일본의 나쁜 이미지와 그 일본에서 발생한 천리교라는 이미지가 겹쳐서 갖가지 곤란과 트러블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된다.

천리교는 일본에서 일어난 신종교이고 개조는 일본인이며 따라서 敎義書도 일본어로 쓰여져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교단 형성의 과정에 있어서 神道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천리교는 일본의, 또는 일본민속의 종교는 아니다.

訓敎의 취지가 원래부터 세계일렬의 인간을 돕는다고 하는 어버이신의 의지에서 나오고 있는 것으로서 일본이라는 테두리를 넘도록 처음부터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테두리를 넘은 곳에서 나오는 것은 일본의 우월성 주장이 아니라 세계 일렬은 형제라고 하는 평등사상이다.

이 천리교의 평등사상에 의혹을 품은 메이지 정부는 시종일관 오야사마께 탄압을 가했다. 때문에 오야사마가 경찰에 구인, 유치, 투옥 당한 회수가 17∼18회에 달한다. 89세 때의 투옥은 엄동설한의 시기로 은밀히 오야사마의 육체적 말살이 꾀해졌다는 흔적이 있다.

오야사마이신 교조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인 1888년 神道 산하의 교단으로 천리교회가 정부에 의해 인가되었으나 압박, 간섭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896년에는 내무성 훈령이 내려지고 포교는 매우 곤란에 처했다. 그리고 그 압박은 결국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天理敎가 원전에만 의거해 가르침을 자유롭게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실제로는 패전 이후의 일이다. 전후 일본이 목표한 평화 지향은 천리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바람직한 사태이다.

기독교에 창세기가 있듯이 천리교에는 "으뜸인 理"라는 인간 창조의 설화가 있다. 그러나 "으뜸인 理"에는 아담과 이브 같은 현재의 인간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인간이 창조되었다고는 나와있지 않다. 먼 장래, 인간으로서 진화할 가능성을 가진 생명체가 어버이神의 수호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어버이神의 모든 활동이 結晶된 결과 태어난 원초의 생명체를 '씨앗' 또는 인간의 '자종(子種)'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 최초의 생명체가 머무는 지점을 '지바'라 부른다고 되어 있다. 당시의 지구 정황은 육지와 바다의 구별이 없는 진흙바다로 시간적으로 말하면 약 10억 년 이전이라고 여겨진다.

긴 지각 변동 끝에 우연히 '지바'를 그 안에 포함한 일본열도가 형성되었다. 지명으로 말하면 일본국 나라현 天理市 三島町의 '한 점'이 되고 지리적 위치로는 북위 34도 35분 48초, 동경 135도 50분 40초에 상당하는 지점이다.

오야사마는 여기에 있던 나까야마 미끼(申山家)의 주부로 이 지점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아 '창조神의 現身'으로 구제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현재 이 지점을 중심으로 천리교의 신전이 세워지고 '지바'의 표식으로서의 '甘露臺간로다이'를 에워싸고 '쓰또메'라는 창조를 재현하는 祭儀가 행해진다.

그리고 '지바'에 있는 교회가 天理敎 교회의 本部이고 이것은 영원히 이전하는 일이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지바'는 현상으로서는 일본에 소재 하는 지점으로 보이지만 교리에서 보면 그 반대로 '지바'의 주변에 우연히 일본열도가 형성된 것으로 '지바'를 모든 근원으로 삼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천리교가 일본의 종교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 교리의 본 줄거리를 어떻게 실현해 나갈 것인가? 이것이 천리교의 과제이며 공동체 구상도 이것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천리교 신자에게 있어서 '지바'는 지구상에 둘도 없는 성지로 인식되어 있다. 없던 세계와 없던 인간을 창조한 장소이므로 천리교 신자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고향이다. 쉽게 말해 혼의 본적지이다. 누구든지 혼의 본적지에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고향에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떠났기 때문에 이 근본되는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되면 돌아가고픈 그리움이 생기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직 성인이 미숙하여 그 이야기를 듣고도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이며 시순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각지에 있는 교회도 '지바'의 방향을 향하여 예배하도록 설계되어있다. 마치 이슬람교도가 성지 메카의 방향으로 기도를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것은, 메카는 인간 창조와 관계가 없다는 것과 메카는 이슬람교도이외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바"는 모든 국적, 종교의 제약이 없고 누구든 숭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 공통의 태어난 고향으로 관념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전은 주야 24시간 개방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 있는 모든 종교시설은 원칙적으로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개방되어있다. 이 유례없는 개방성이 아시아 공동체 나아가 종교통일의 구상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 개방성이 철저하면 천리교는 일본의 종교라는 테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고 세계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바"에 있는 교회본부에 천리교도 양성기관을 비롯하여 교육, 문화, 스포츠, 음악 등 모든 시설이 집중해 있다. 그 중에서 알려져 있는 것은 외국어를 주체로 하는 천리대학 및 대학 부속 천리도서관, 천리 참고관이다.

도서관에는 기독교 관계의 고문서도 많이 보관되어 있다. 참고관에는 세계 각국의 민속자료가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고 일반에게 무료로 공개되어 연구의 편의를 꾀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가 일련의 내용물이다. 그밖에 "휴식의 집(懲家)"라고 부르는 1천 개의 베드를 갖춘 근대병원이 있고 의료에 공헌하고 있다. 의사 전문가의 국제교류도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다.

이것도 개방성의 발로이다. 국제 심포지엄도 근년 활발하게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천리대학은 원래 해외 포교에 필수조건인 외국어학습을 목적으로 1926년에 설립된 것이다. 외국어학부에는 8개학과가 있는데 아시아 관계의 언어로 설치되어 있는 것은 한국어, 중국어, 인도네시아어의학과이다. 이것들은 60년 이상의 축적이 있으므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인재를 파견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 인재의 푸울이 있다는 것은 공동체 구상에 공헌할 수 있는 재료이다.

천리대학에는 選科 일본어과 라는 2년 코스의 외국어 유학생 제도가 있고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끊임없이 학생이 찾아온다. 졸업 후에는 여러 가지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인원수가 한정되어 있으나 머지않아 공동체 구상에 힘을 발휘하는 일도 꿈은 아니다.

여기서 한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나의 친구인 A군은 유학생을 보살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인도로부터의 유학생이 두 사람 있었다. 졸업이 가까워 졌으므로 인사차 찾아 왔으나 그때까지 책상을 나란히 하고 같은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건만 "한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왔는데 또 한사람은 문밖에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순간 A군은 카스트 제도가 문득 머리에 떠 올랐다. 천리 또는 일본에 있는 동안 카스트는 대단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드디어 인도로 돌아갈 무렵 그로부터 반년 후, A군은 인도를 방문했다. 공항에서 십 수명의 유학 경험자의 환영을 받았으나 한사람만은 50미터쯤 떨어진 장소에 쓸쓸히 서 있었다. 문밖에서 작별인사를 한 남자였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A군은 그 순간 일동에게 제안했다.

"여기는 인도 땅이므로 그 습관에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은 천리교의 서클이다. 천리교이서는 일렬 형제이며 신분에 따라 차이를 둘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데, 저기 따로 떨어진 장소에 서 있는 사람을 서클에 가담시키는 일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식사도 한 테이블에서 하고 싶다."

또 한가지 덧붙여 말하면 천리교는 각종 스포츠, 음악이 활발한 곳이다. 유도장에는 아시아 각국의 선수가 끊임없이 연습을 하러 오고 있으며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그 숫자는 증가 일로에 있다. 축구장에는 인도, 파키스탄, 싱가포르 또는 한국팀과의 국제대회가 종종 개최된다. 음악의 교류도 활발하여 천리교 취주학부가 타이 왕실의 초대로 방콕과 기타 지방에서 연주를 한 일도 있다. 최근에는 6월에 빈 음악대의 초대로 아악이 유럽에서 연주여행을 하고 있다. 음악에 국경은 없는 것이다.

그 이상의 일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발표할 가치가있는 사항은 유감스럽지만 없다. 뿐만 아니라 해외포교를 의도하여 갖가지 벽에 부딪치고 고심하고있다는 것이 가식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곤란이야말로 천리교가 일본의 종교로부터 세계의 종교로 탈피하는데 있어서의 시금석이라고 받아들이고 노력을 경주하는 단계에 있다.

이 노력이 결실을 맺는 정도에 비례하여 천리교가 공동체 구상에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노력은 확대하는 일은 있더라도 축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천리교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특정의 정치단체와 결탁하는 행위를 가능한대로 꾀하고 있다. 이것도 공동체 구상에는 필요한 조건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종교통일이라는 문제인데, 이것도 공동체 구상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제안을 할 단계는 아니다. 그러므로 천리교는 다른 종교와 적대한다거나 싸우는 유형의 종교가 아니고 자신감을 내면에 간직하고 관용의 정신으로 사태에 임하려고 하는 종교라는 것만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

주) 西山輝夫 교수의 글을 인터넷 항해 도중 발견하고 저희 게시판에 올리게 되었는데 번역상의 오류 등을 약간 수정하여 홈에 게재키로 했다. 종교학자로서 객관적인 천리교에 대한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생각되므로 참고하시기 바란다.

회생의 모험자 최재한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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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행은 온 세상을 구제하는 길 벙어리도 말하게 하리라 4-91